제 697 호 동물과 환경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비건
해마다 증가하는 국내 채식 인구, 15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단순히 건강 목적의 채식뿐 아니라 동물 복지나 환경보호, 그 이상의 가치를 생각하며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비건은 채식주의자를 의미하지만 이 안에 담긴 의미의 범주가 동물과 환경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확대되며 비거니즘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은 국내 채식 인구가 15만 명뿐이던 2008년에 비해, 2018년에는 150만 명으로 그 수가 10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2019년에는 200만 명, 올해는 250만 명으로 추정되는 국내 채식 인구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또한 미국 시장조사업체 CFRA는 글로벌 MZ세대가 친환경과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를 주된 관심사로 삼으며 세계 채식 시장이 연평균 9.6%만큼 성장했고, 다가오는 2030년에는 그 규모가 116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토대로 제품을 소비하는 미닝아웃(Meaning Out) 문화가 MZ세대를 주축으로 자리 잡으며 가치 소비를 추구하는 비건을 향한 관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공존을 위한 유연한 비건, 완벽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채식주의자란 육식을 피하고 식물성 재료로 만든 음식만을 먹는 사람을 말하지만,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다 같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오늘날 채식주의자의 종류는 단계별로 비건, 락토 베지테리언, 오보 베지테리언, 플렉시테리언 등 세분화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비건은 1944년 베지테리언 소사이어티라는 비영리 단체에서, 유제품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개념 연구를 통해 제시된 용어이다. 비건은(vegan) ‘beginning’과 ‘vegetarian’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로 육류와 생선, 계란, 우유를 먹지 않는 가장 적극적이고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의미한다.
▲단계별 채식의 유형 (출처 : 투어페이퍼)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채식을 실천하고 있지만, 항상 채소만 먹는 것이 비건의 전부는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고기를 먹지 않으려 노력하거나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비건 식당에 방문하며 유연하게 채식을 실천하기도 한다. 동물과 환경을 위한 비건의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식습관 이외에도 다양한 비거니즘 실천 방법이 제안되며 유연하게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전시동물 관람하지 않기, 가축의 가죽이나 털이 포함된 의류를 사지 않기, 동물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 사용하지 않기 등 그 예가 다양하다. 비건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심적 부담감도 줄어들자 비건 시장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기준으로 본인이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수준의 비건을 실천하는 문화가 확산되며,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환경과 생명을 생각하는 비거니즘
육류 소비는 어떻게 환경을 파괴할까? 채식은 정말 지구를 숨쉬게 할까? 비건과 환경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자.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축산업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자동차, 비행기 등 전 세계의 운송 수단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보다 많다고 밝혔다. 축산업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지구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8%로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 또한 식품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4 이상을 차지하는데, 그 80%를 축산업이 차지한다. 축산업을 위해서는 목초지, 도살장, 사료 경작지 등을 위한 드넓은 토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산림도 불태워 훼손할 수밖에 없다. 가축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사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탄소 배출이 일어난다. 사료를 먹은 소 한 마리는 소화를 위해 메탄가스를 1년에 100kg씩 방출하고, 11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양과 동일한 21.3kg의 분뇨를 매일 배출한다. 메탄가스가 지구 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은 이산화탄소의 25배이다. 또한 소고기 1kg을 생산하기 위해 총 16kg의 사료와 15,000L의 물이 사용되며, 생산된 고기를 보관하기 위한 냉동저장과 판매를 위해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온실가스는 환경을 위협한다. 이처럼 가축을 길러져 식탁에 고기로 올라오기까지 끊임없이 지구를 파괴하기 때문에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실천하는 것이 기후변화의 효과적인 대응책으로 떠오르고 있다.
MZ세대의 비건은 환경 보호뿐만 아니라 동물 보호를 목적으로 삼기도 한다. 최근 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동물권을 주장하는 의견이 많아졌다. 돼지나 소 등의 동물들이 단순한 가축이나 수단으로써 쓰여선 안 되고, 인간처럼 하나의 개체와 생명으로 인식돼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류 소비를 위해 동물들이 좁은 사육장에서 비윤리적이고 잔인하게 가축되는 것에 반대하며, 육류 소비를 지양하는 방법으로 비건을 실천한다. 지난 3일, 한국동물보호연합에서는 알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매년 산 채로 분쇄되는 약 5000만 마리의 수평아리 대학살 중단과 비건 문화 확산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처럼 비건은 이제 단순히 건강의 목적을 넘어 환경적이고 생명적인 차원의 목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비건 시장에 뛰어든 기업들
비건 제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그 흐름에 맞춰 기업들 역시 비건 시장에 진출하였고, 다양한 비건 제품과 서비스가 쏟아지고 있다. 토니모리는 국내 최초 비건 아이라이너 ‘백젤 아이라이너 Z’와 화장품 업계 최초 무라벨 비건 토너를 선보였으며 아모레퍼시픽에서는 비건 화장품 브랜드인 ‘이너프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새로운 비건 제품이 출시된 영역은 화장품뿐만이 아니다. 식품의 경우, 다음 달에 국내 최초로 ‘루이스크리머리’라는 두부와 견과류를 활용한 비건 치즈 전문 브랜드가 생길 예정이다. 또한 홍대, 광화문 등에서는 비건 안주나 술, 칵테일을 파는 비건 펍이 생기고 있으며, 편의점 역시 비건 시장에 뛰어들어 GS25의 머쉬룸칩과 포테이토웨지스, CU의 베지크리스프 같은 비건 상품이 출시되었다.
비건 시장은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호텔까지 확산됐다. 워커힐 호텔앤리조트는 8월 11일에 비건 전용 객실을 도입한 체험 패키지 상품인 ‘비긴(Begin) 비건’을 업계 최초로 출시하였다. 이 상품은 객실 전반에 비건 인테리어와 비건 용품을 도입한 것으로, 객실 어메니티 제품까지도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제품으로 구성하였다.
▲워커힐 호텔앤리조트의 ‘비긴 비건’ 객실의 모습 (출처: 워커힐 홈페이지)
이렇게 다양한 기업들이 비건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이유는 비건 시장의 미래성 때문이다. 뷰티 업계의 관계자는 비건 뷰티라는 개념이 대중들에게 생소하지만 잠재적 소비자는 상당수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가격이나 다양성 등을 보강해 출시된다면 시장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비건 식품 업계의 관계자는 최근 웰빙을 뛰어넘어 지구환경과 동물복지를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비건 제품 시장이 확대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내수는 물론 수출이 늘어날수록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라고 하였다. 기업의 입장에서 주요 소비층인 MZ 세대들의 가치 소비와 관련된 시장의 추세는 긍정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비건 시장에 뛰어들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비건 시장은 아직 초입 단계이다. 실제로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등의 카페에서 비건 고객의 취향을 고려하여 비건 메뉴를 개발했고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전체 매출 비중에서 비건 메뉴가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적은 편이다. 써브웨이의 얼터밋 샌드위치나 버거킹의 플랜트 와퍼처럼 비건 메뉴는 정식 메뉴로 채택되지 못하고 시즌 메뉴로 끝나거나 단종 되는 경우가 많았다. 롯데리아의 미라클 버거 또한 지난해에 약 240만 개가 팔렸지만, 월 100만 개씩 판매되는 불고기 버거 같은 대중적인 햄버거 메뉴와 비교하면 매출 비중이 적은 편이다. 이렇게 아직 초입 단계인 비건 시장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만, 국내 채식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비건을 선호하는 이유가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건 시장의 미래성은 밝다. 지금 당장 매출 비중이 적다고 비건 시장을 배제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계속해서 보완한다면, 빠르게 확대되는 비건 시장에 발맞춰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비건 시장의 선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비거니즘, 인간을 사랑한 지구를 위해
어느덧 우리는 제품이 아니라 가치를 소비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제 소비자들은 더 이상 광고나 브랜드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가치 판단을 토대로 제품을 구매한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내 비건 인구가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비거니즘을 향한 무분별한 오해와 편견은 만연하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 ‘빌 브라이슨’은 “인간은 인간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의 적’은 ‘인간’이 되어 버린다.”고 경고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에게 자원을 제공한 지구는 인간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지구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일은 대단한 목적이나 포부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비거니즘은 우리가 누렸던 권리에 대한 당연한 보답이다. 우리를 사랑한 지구를 위해, 오늘 저녁은 육류 대신 푸릇한 채소로 식탁을 채워보는 것이 어떨까?
윤소영 편집장, 이은영·정유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