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5 호 [상명만평] 가정의 달은 마지막까지
황인선 (만화학과 3)
제 675 호 [교수칼럼]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디지털
서지용 교수 (경영학부)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디지털 금융최근 금융의 모습이 많이 바뀌고 있다. 시간,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인터넷 플랫폼에서의 거래횟수가 크게 늘고 있으며, 스마트폰만 있으면 손쉽게 금융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앞으로 뱅킹은 필요하지만 은행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지적이 과장되지 않은 듯하다. 혹자는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디지털 기기를 통한 금융거래가 늘고 있는 현 시대를 ‘디지털 금융 노마드(nomad)’의 시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금융거래 접근성과 편의성이 중시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금융업의 최대 화두는 디지털 기술의 고도화로 이동하고 있다. 디지털 금융서비스의 질적 수준이 IT기술수준에 달려있다는 판단에서다. 대부분 금융기관들이 블록체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력을 금융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제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다수 금융전문가들도 금융의 중심이 사람에서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금융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모멘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디지털 핵심기술은 금융의 영업방식에 큰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은 이미 은행의 고비용 송금방식을 변화시켰다. 스페인 최대은행인 산탄데르(Santander)는 블록체인 기반 국제송금 솔루션 업체인 리플(Ripple)을 통해 송금시간 단축과 비용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AI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시스템도 금융투자회사들의 사업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있다. 로봇(robot)과 투자전문가(advisor)의 합성어인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는 자산운용 서비스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로보어드바이저가 고소득층의 전유물이던 고액 자산운용 서비스 거래비용을 대폭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빅데이터 분석기술도 충분한 담보와 신용이력이 없는 사람들의 대출심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은 보험료 산정, 보험금 지급에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해당 기술은 보험설계사의 고객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실시간 사고접수를 통해 보험금 지급 속도를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금융이 결코 사람과 사람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금융플랫폼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비즈니스의 확장을 시도한다.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금융거래 확산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기술력이 금융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디지털 금융 비즈니스의 성공요인은 오히려 신뢰와 소통일 것이다. 금융플랫폼을 찾는 회원간의 신뢰와 소통을 바탕으로 투자관련 정보공유가 이루어지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사업 소재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소설 네트워크 회원의 정보와 신용을 활용하는 소셜 트레이딩, 소셜 크라우딩 보험, 소셜 네트워크 기반의 공동체 보증대출 등이 주목받고 있다. 해당 금융서비스가 거래비용을 낮추고, 투자수익률을 제고시킬 수 있는 혁신적 금융서비스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업은 전통적으로 휴먼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아날로그식 금융에서 디지털 금융으로의 변화가 금융업 본질인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훼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시되고 있다. 과거 금융거래가 금융기관과 고객간의 이차원적(two-dimensional) 소통에 머물렀다면, 디지털 금융에서는 플랫폼 회원과 회원간의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소통을 강조한다. 결국, 디지털 금융의 차별적 경쟁력은 인종, 종교, 성별, 세대별 특징과 차이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 확보에 있다. 이미 시장을 선도하는 금융회사들은 대체로 플랫폼 사업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결론적으로 디지털 금융의 편의성이 디지털 기술 발전에서 나온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신뢰와 소통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디지털 금융의 본질임도 엄연한 사실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금융거래의 접근방식, 시간, 장소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지만, 사람이 중심이 되는 금융업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제 675 호 [사설] 교육현장의 혁신이 필요한 때
2016년 세계 경제포럼에서 등장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는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전반에 걸쳐 다양한 담론을 양산해 냈다. 제1차 산업혁명의 혁명적인 변화 후 기존의 산업에 테크놀로지가 결함된 4차 산업혁명의 담론은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이거나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 와중에 4차 산업혁명 담론이 가장 첨예하게 대두한 곳이 학교 교육, 그중에서도 대학교육의 현장이다. 급속한 고령화와 학령인구의 감소, 급변하는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대응해 대학교육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모색해야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미래 변화에 대비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개편과 전공의 벽을 뛰어넘는 학사제도, IT기술과 전통학문의 융합, 학사구조의 개편 등을 통해 대학은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내적 요인이든 외적 요인이든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초연결, 초지능을 특징으로 하는 현재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어 그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읽고 대응해야 하는지가 급선무인 상황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오늘날 대학교육 현장이 유연하게 변화를 수용하고, 교육의 내용이 변화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발명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커즈 와일이 2005년에 내놓은 미래예측보고서라 할 책 「특이점이 온다」는 미래사회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 예측한 과학기술이 현재 우리 곁에 와 있음을 보여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양자인간」 같은 과학소설의 예측을 뛰어넘는다. 인간이 창조한 기술이 특이점의 시대에 오면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심지어는 유전공학, 나노공학, 로봇공학 덕분에 인간은 생물학적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기계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인공지능이 있고, 인간을 넘어선 강한 인공지능의 등장을 2045년으로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커즈 와일이 말한 강한 인공지능의 도래시점은 그의 예측 이후 근 20여년이 가까워오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2045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가까운 근 미래의 우리 앞에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우리의 대학교육현장은 교육내용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인간의 능력이 더 이상 기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 이상 고등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길러야 할 능력들은 과거에 배웠던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대학교육에서 낡은 강의노트로 대변되는 도제적인 지식의 전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대신 급격한 기술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교육내용의 변화와 구성원들의 변화가 따라야할 것이다. 현재 대학교육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탐색능력, 문제해결능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협업능력 윤리의식 강화 등의 교육일 것이다. 이견이 있지만 수많은 교육공학의 방법론들을 적용한 다양한 교육방법의 모색 역시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대학교육의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현재 대학교육의 현장이 과연 기술발전에 대응할 미래 사회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학문의 탐구보다는 급변하는 교육환경의 변화에 다양한 형태로 변화 할 것을 요구받는 교수자들의 피로감과 입시와 경쟁에 길들여진 학습자의 등장이 그 이유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입시경쟁에 노출된 학습자들의 무기력과 퇴행적인 사고능력은 놀랍게 높은 대학진학률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육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한다. 최근의 학습자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협업능력을 요구하는 팀플, 토론이나 프로젝트 수업 등 문제해결능력 중심 수업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다. 대신 교수자의 강의를 선호하며, 창의적인 사고보다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따르려는 온존적인 경향, 객관식 문제나 경쟁을 통한 상대평가가 공정하다는 인식 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초중고의 교육과정이 학습자중심, 과정중심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을 오늘날 대학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글을 읽을 수 있지만 텍스트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실질문맹률이 OECD국가들 중 매우 높다는 사실은 퇴행적인 교육 현장의 실상을 말해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인간이 기계가 되고 기계가 인간이 되는 미래 변화의 시점인 특이점을 넘어선 시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포스트 휴먼의 시대가 눈앞에 와 있다. 그리고 교육의 현장에서는 대학의 구조와 교육의 변화에 대한 정책적인 요구와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 제도적인 변화와 함께 강한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기술발전을 대신할 수 있고, 미래사회의 창의적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을 위한 현장의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제 674 호 [영화로 세상읽기] 너의 삶이 나의 삶으로
어벤져스:엔드게임(2019) 감독 : 안소니 루소 2019년 4월 24일에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2주가 지난 지금도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영화는 국내 개봉 1일째에 관객수 100만을 돌파하고 11일째에 누적 관객수 1000만을 돌파하며 국내 최단 기록을 갱신하였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지난 11년간의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이다. 이 영화 개봉에 앞서 루소 감독 형제는 관객들에게 트위터를 통해 편지를 보여주며 침묵을 요청하고 스포일러 금지령을 내렸다. 지난 6일 이후 스포금지령이 해제되었지만 본 영화평이 스포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하길 바란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 마블 히어로의 양대 산맥인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퇴장 방법이 서로 다르다. 영화 ‘아이언맨 1’에서 토니 스타크는 스타크 인더스트리라는 무기개발 회사의 사장으로 기업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무기가 테러리스트에게 사용되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약자를 도와주는 아이언맨으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기업가로서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초반에서는 자신의 가족을 먼저 살피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어벤져스’에서 아이언맨은 세계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핵미사일을 갖고 우주로 날아가 세상을 구하였으며,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도 인피니티 스톤을 사용하여 모두를 구해냈다. 반면 캡틴 아메리카는 임무 수행 중 자신의 친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였다. 마지막에는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는 비행선에 탑승한 후, 자신을 희생하여 그 비행선을 북극에 추락시켜 세상을 구한다. 70년이 지난 이후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에도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지키며 모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또한 이 영화의 전투신을 살펴보면 캡틴 아메리카가 토르의 망치 묠니르를 들고 싸울 수 있을 만큼 ‘고귀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토르 1’ 시작에서 토르는 자신의 왕국인 아스가르드만을 위해 무분별하게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종족은 무참하게 살해하였고 결국 망치의 권능을 잠시 빼앗긴 적이 있다. 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고귀하지 않은 자’에게는 망치를 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캡틴 아메리카가 모두를 위하는 ‘고귀한 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본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 캡틴 아메리카가 다 사용한 인피니티 스톤을 제자리에 두고 자신만의 삶을 살다가 현재로 돌아온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남을 위하는 삶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산 캡틴 아메리카는 현재에 와서 캡틴 아메리카의 자리를 2대에게 물려주고 영웅의 자리를 벗어난다. 두 영웅은 어벤져스의 두 리더였지만 각자 삶의 방식이 달랐으며 은퇴의 방식도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아이언맨은 자신의 죽음에서 보여주었으며 아이언맨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캡틴 아메리카가 은퇴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캐릭터의 가치관 차이는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을 정도지만, 마지막에는 서로의 삶의 방식을 바꿀 만큼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마블의 영화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지난 11년간의 대 장정을 마무리한 그들의 퇴장은 우리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을 넘어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제 674 호 [책으로 세상보기] 역사의 진보, (내) 인생의 진보
[책으로 세상보기] 역사의 진보, (내) 인생의 진보 역사란 무엇인가(1969) 지은이 : E.H.카 출판사 : 00 참 20대 청춘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사회는 고3 때까지 대학을 가야 한다며 명확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내신 시험•수능만을 가르치고, 우리는 이를 배우고 공부하며 살아가다가 성인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명확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영역에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그뿐만 아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로봇, 무인기계 등의 신기술과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편리함‘을 가져옴과 동시에 ‘불안’을 야기한다. 이로써 ‘취업난’은 점점 심각해져 무한 경쟁과 취업 스트레스로 인한 압박감,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대다수의 20대를 힘들게 한다. 이러한 세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 역시 마찬가지로 힘들어한다. ‘잘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고민들 속에서 나의 일상은 흘러간다. 그런데,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런 나에게 “비관과 절망에 빠지지 말고,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 ’진보로서의 희망‘을 품고 나아가라“고 이야기했다. ‘카’는 1차,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 원자폭탄 투하, 냉전 시기를 겪고도 ‘진보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당시 대다수의 서구의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비관주의, 절망, 회의주의 속에서도 ‘카’는 진보의 믿음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카’는 우리 인류의 역사는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퇴보하더라도, 길게 보면 전진하고 나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사회적 획득 과정을 통해 역사는 진보한다”고 본 것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조망하면 우리 인류는 발전하고, 나아졌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먼 거리를 편리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왕과 귀족’이 중심이 아닌 ‘시민‘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으며,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100년 전, 200년 전, 조선시대와 비교해보더라도 사회, 정치, 문화, 경제, 기술, 인간의 의식 수준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룬 것임을, 더 나은 사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역사에 절망스럽고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나아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발전하고, 발달한 사회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내 인생이라는 역사’에 있어서도 ‘진보로서의 희망 - 더 나아갈 수 있고,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려 더 노력하기로 했다. 우리 인류의 역사가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갔듯이, 나도 ’내 인생이라는 개인의 역사’가 당장 힘들고, 불안해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겠다. 쉽지 않겠지만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고, 비관하고 절망하면 내 인생의 역사는 더 퇴보할 뿐이다. 나는 어느 순간 많이 지치고 힘들다는 이유로 점점 ‘고정형 마인드셋’으로 살아간 것 같다. 힘든 순간에 좌절과 포기를 하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내 인생의 역사’를 퇴보시킬 뿐인데 말이다. ‘카’의 진보로서의 역사에 대한 믿음은, 내 인생이라는 역사에 대한 ’성장형 마인드셋‘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나는 앞으로 다시 힘을 내어 ’성장형 마인드셋‘을 장착하고 살아갈 것이다. 지금 순간적으로 힘들거나, 뒤처지는 것 같아도, ’언젠간 나아가리라는 믿음,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품고서 말이다. 나는 성장하고 있고, 변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갈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박영수 (경영학부 • 4)
제 674 호 [기자석] 나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나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나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외적으로 어려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어려지고 있다. 엄마는 내게 “너는 무슨 나이를 거꾸로 먹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주관적으로 나를 보았을 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이 온갖 장신구에, 귀여운 헤어스타일에,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으려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런 것들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이 공주 인형을 가지고 놀 때, 나는 오히려 티비를 보며 춤을 추고 예능을 봤다. 엄마가 머리에 망을 씌우려고 하니 화를 내고서 결국은 양갈래로 묶기만 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귀여운 인형을 보면 마구 사고 싶고, 캐릭터 상품들을 보면 그대로 앞에 멈춰서버린다. 단순히 내가 어린이들처럼 장난감이 너무 귀여워보이고 갖고싶어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내면의 내가 너무 지쳐있어서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것 같다. 나는 요즘 갈수록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내면이 어려지고 있는 건 정말 확실한 것 같다. 흔히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물론 아직 21세에 불과하지만, 맞다. 나는 내면이 ‘어른이’다. 하지만 결코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거의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우리나라는 여전히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또한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근무 시간을 보장해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야간근무나 주말근무를 시키는 곳은 많고, 이로 인한 국민들의 스트레스 지수도 높은 편이다. 요즘 시대에 평범한 시민인 우리는 ‘휴식’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닌 그런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휴식시간에도 남은 업무가 있거나, 아직 해야 할 업무가 많다면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늘어지기 마련이다. 즉,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 내면에 이런 부분들이 조금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피로나 스트레스가 더 심해진다면 우울증이 올 수도 있고 무기력증, 혹은 그 외의 다른 증상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는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 부분인 우리 몸에도 피해를 준다. 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이다. 나도 그랬다. 각박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나도 물론 ‘어른의 시간’을 짧게 경험했지만, 많이 방황했다. 늘 내가 아는 반경 내에서만 생활을 하던 중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대학생이 되어서는 내가 온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던져져야만 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매일같이 봐도 친구들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대학생은 그것보다도 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그런 인간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다. 4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하나 이상의 전공과목을 깨우쳐야만 했다. 그마저도 어느 도움도 없이, 학창 시절에는 흔하디 흔하던 그 방과후 수업도 하나도 없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꽤 자주 힘들어했던 것 같다. 세상은 이런 현상을 ‘현타(현실자각 타임)’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 현타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내가 그런 시간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내가 내면을 ‘어른이’의 모습으로 살아가게끔 자극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언니들은 나보다 4~5살 정도 많은데, 한 캐릭터나 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분야에 빠져서 산다. 쉬는 날이면 새로 나온 제품들을 구경하러 나가고, 매번 제품을 구매해 돌아온다. 언니들의 가방에는 늘 그런 물건들이 넘쳐난다. 나는 그런 언니들을 보며 작년까지만 해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어린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반대 입장도 되어보아야 한다. 늘 주변에서 그런 제품들을 사고 쓰면서 좋아하던 언니들의 모습을 자주 보던 것이 나도 모르게 생각났고, 그걸 보고 자란 나도 어느 순간 그런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선 느꼈다. 내 안에서 엄청나게 행복한 감정들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이렇게 ‘어른이’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내면이 ‘어른이’가 된 순간부터, 나는 내면이 행복한 ‘어른’이 된 것이다. 힘들던 순간들을 극복한 나처럼, 많은 어른들이 스스로 내면에 행복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김수인 기자
제 674 호 [편집장의 시선]무지에 대한 무관심
“저는 불의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해가 되어 나에게 다가오더라도 저는 이 세상을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막심고리끼 「어머니」 중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인 파벨 블라소프가 그의 어머니 펠라게바 닐로프냐에게 한 말이다. 파벨 블라소프는 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주정뱅이였고 펠라게바 닐로프냐는 글씨도 읽지 못하는, 권력의 변두리에 위치한 여성 노동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무지에 맞섰고 마침내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나는 항상 나의 무지를 두려워한다. 사람으로서의 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기자로서 펜을 쥔 내가 누군가를 인격 살인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의도가 전혀 없었던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살점 깊은 곳까지 도려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짊어지고 있다. 동시에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사회에 대해 무지했을 때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특정 중요 사안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대우받든, 기계적 부속품으로 인지되든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앎’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은 스스로 죽음에 다가서는 것이자 사회 기득권이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축적할 수 있게 해주며, 비로소 공동체를 병들게 만든다.그런가하면 자신의 무지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몰라서 그랬다”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핑계는 없다. 우리 대학 안에서 유의미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학내 사안, 정치사회적 이슈 등에 대한 무지와, 이 무지에 대한 무관심이 오히려 여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 심각한 병폐로 학생사회에 악순환의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무관심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총학생회 역시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며, 그 의지 또한 찾아보기 쉽지 않다. 총학생회가 캠퍼스의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진보를 위한 목소리가 없기 때문에 학교도 제 자리에 머물러 있다. 캠퍼스의 경사만큼이나 기울어진 대학 사회로 인해 발생하는 학생 자치의 붕괴가 발생하고 있다. 학교와 학생 사이의 정보 격차 등으로 생기는 학생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앉아 시혜만을 기다려선 안 된다. 무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스스로를 절벽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무지에 대한 무관심은 대다수의 학생들에서 학생자치로 이어지며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요한 의제 또한 확장성은 물론 진중함까지 떨어지는 온라인상에서 기껏해야 하루 이틀 이어지는 실정이며, 학생총회 등 공개적인 토론장에서 함께 연대하여 고민하고자 하는 욕심은 보이지 않는다. 학내에서 어떠한 의제도 전해질을 따라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학내언론이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없어진다. 모든 사람이 지식에 통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학생에게 주어진 분명한 사명은 무지에 맞서는 것이다. 파벨 블라소프와 펠라게바 닐로프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질문하는 자세,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하다.무지에 맞서자. 그것이 배움이고, 그래야만 학생이다. 그리고 그 저항이 행해지는 장소가 대학이다.
제 674 호 [교수칼럼] 박물관과 함께하는 유학생 문화 나눔<단오맞이 전통체험>
하희정 교수 (의류학전공) 벚꽃이 한창이더니 어느덧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5월이다.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곧 모내기 시기가 오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초여름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5월 단오도 생각이 난다. 설, 추석, 한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는 단오는 음력으로 5월 5일이다. 단옷날 우리는 풍요와 건강, 안녕을 기원하며 세시풍속을 즐기면서 수리떡을 먹는다. 중국에서는 쫑쯔를 먹고 용선 경기를 하면서 굴원을 추모한다. 일본은 중국과 같이 쫑쯔를 먹고 우리나라처럼 창포를 사용하지만 음력이 아니고 양력 5월 5일이 단오이다. 단오의 또 다른 이름은 천중절, 수릿날로서 신성한 날, 최고의 날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오와 관련하여 여러 지역에서는 다양한 의례와 행사가 행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례 깊고 유명한 단오 축제로는 강릉단오제를 들 수 있다. 민족 전통 민속 축제의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는 강릉단오제는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13호로 등록되었고,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난 5월 9일에는 ‘지나온 천년·이어갈 천년’을 주제로 2019년 강릉단오제 시작을 알리는 신주미봉정 및 빚기 행사가 열렸다. 신주미는 집안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기 위해 신에게 바칠 술을 담그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6월 3일부터 6월 10일까지 씨름, 그네, 투호, 줄다리기, 윷놀이 등의 민속놀이 행사가 이어지며, 단오신주·수리취떡 맛보기, 창포 머리감기, 단오부채그리기 등의 다양한 전통 체험이 이루어진다. 단오는 고대의 제천의례가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오에 행해지는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씨름, 그네뛰기, 활쏘기 등이 있으며, 녹색과 홍색의 단오빔을 입고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물로 감은 머리에 창포 뿌리로 만든 창포잠을 꽂는 치장을 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 좥단오풍정좦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이 갈 것 같다. 창포잠 양쪽에 붉은 색의 연지를 바르거나 수·복자를 썼는데, 이렇게 하면 악귀를 쫓아 액운을 막고 건강과 복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갓 채취한 취에 쌀가루를 버무려 만든 수리떡을 올려놓고 단오고사를 지낸다. 수리떡은 단오를 맞아 만들어 먹는 절식으로 건강을 기원하고 더위와 액운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수리취가 주재료라 쌉싸름한 맛을 낸다. 취 종류 중에 참취와 곰취는 나물로 주로 사용되고, 수리취는 색과 향이 좋아 나물보다는 떡을 만드는데 주로 이용되어 떡취라고도 부른다. 수리취떡으로 인지도가 높은 곳은 강릉단오제가 열리는 강원도로 취의 특성상 산지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라 이곳에서 많이 채취되는데, 강릉단오제 생활권인 정선이 수리떡으로 특히 유명하다. 더위를 잘 이겨내라는 의미에서 선물로 주고받는 단오부채인 단오선도 있다. 공영에서 대나무 생산지인 전주·남원 등에 부채 도안과 부채 제작 방법 등을 일러주고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도록 하였는데, 이 부채를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신하들은 자신의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생겨난 풍속이라고 한다. 부채는 크게 원선과 접선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원선은 부채살에 비단이나 전통 한지 등을 붙여서 만든 둥근형의 부채이고 접선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부채를 가리킨다. 우리대학 박물관에서도 2019 박물관과 함께하는 유학생 문화 나눔 행사로 5월 29일 학술정보관과 밀레니엄관 사이에서 〈단오맞이 전통체험〉 행사를 실시한다. 재학생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단오부채 만들기, 수리떡 맛보기 등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경험 할 수 있는 〈단오맞이 전통체험〉을 통해 올 여름도 건강하고 무탈하게, 시원한 여름나기가 되기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대나무를 쪼갠 살들 위에 닥나무를 원료로 한 전통 한지로 감싸 만든 단오부채를 부치고 있노라면 어느새 더위는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도 날아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제 674 호 [사설] 갈등의 시대를 넘어서려면
현재 우리 사회는 많은 영역에서 극단적 갈등의 상황이 존재하거나 증폭되어 가고 있다. 보수와 진보, 우와 좌로 나누어진 이념의 갈등, 구세대와 신세대로 구분되는 세대 간 갈등, 남성과 여성 간의 젠더 갈등 등 실로 갈등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종류와 내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갈등은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하여 왔고 지속적인 논쟁의 이슈가 되어 왔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단순히 논쟁의 차원을 벗어나 극단적인 표현과 개인적인 인신공격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누르고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야 말겠다는 결연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무릇 사회는 현재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의해 발전하고 균형을 이루어 왔다. 당면한 현실에 만족하고 그 상황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면 현상의 유지는 고사하고 퇴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사회변화를 위한 담론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발전을 위한 토론과 논쟁은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정당한 방법과 절차에 따를 때에만 그 결과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정당성은 차치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부족한 상태에서 자신이 속한 진영을 대변하거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내세우며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제압하는 것이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생각과 이념은 각각 타당하고 명확한 근거가 있으며, 각 주장에는 합리적인 기반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만일 절대 무오한 이념과 사상이 존재했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을 것이며, 다양한 학문과 사회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현대의 우리는 하나의 틀 속에서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활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생활이 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다양한 이념과 문화 간의 갈등이나 충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다양한 문화가 갖고 있는 특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공생해 나가는 방법, 두 번째는 소수의 집단에서 지배적인 집단의 문화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방법, 세 번째는 기존의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통합한 새로운 제3의 문화 내지는 이념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지배적인 이념이나 문화 집단이 자신과는 다른 다양한 소수의 의견이나 사상을 지배하거나 말살해 버리는 방법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르며,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네 가지의 방안 중에서 가장 강제력이 크고, 통합의 가능성이나 수용도가 낮은 방안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자신의 가치를 강제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형성하고, 때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문화 간 갈등을 조장하거나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된다. 근대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많은 이념적 갈등이 있었고, 때로는 하나의 이념이 다른 이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자신과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의 악’으로 규정하였으며, 나아가 강제력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억압하거나 핍박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를 경험했던 이른바 기성세대들이 사회의 주축이 된 지금, 우리는 과연 지난 시절 그토록 염원하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현재 상황만을 두고 평가해 본다면 그 답은 ‘아니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의 사상과 이념을 강요받았던 세력이 또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강요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또 다른 사회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와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세상을 지배했던 이념과 가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절대로 하나의 방향으로만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심지어 한 시대에서의 선이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는 없어져야 할 악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우리는 다양한 이념과 가치를 위한 건전한 논의와 토론이 보장된 사회에서 더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념의 갈등이나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젠더 간의 갈등 등은 이전에도 존재했고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회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이러한 갈등이 이용되고 점점 증폭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서는 자신과 다른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인정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비판과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제 672 호 [기자석] 당신의 불편함도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천에 사는 나는 매일 학교를 가기 위해 남영역을 이용한다. 남영역은 국민대와 상명대를 다니는 친구나 직장인들이 학교나 직장을 가기 위해서 늘 붐비는 곳이다. 사람들은 버스를 탈 때에 자리를 앉기 위해서 새치기를 하거나 뒷문 승차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부딪혀 다치거나 서로 기분이 나쁜 경험이 빈번했다. 나 그리고 함께 등교하는 친구 또한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면 등굣길부터 기분이 나빴다. 행복해야 할 등굣길인데 시작부터 기분 나쁘게 등교하지 않고 좋게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했다.평소 다른 정류장을 이용할 때에는 버스마다 줄 서는 라인이 있어서 줄 대로 들어가며, 새치기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이 문제에 대안으로 적용하여 줄 라인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안을 실행하는 것은 막연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페인트를 사서 직접 그릴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땅이 누구 소유의 땅인지 몰라서 허락을 받지 않고 그리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함께 고민해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그렇게 함께 고민하던 중 남영역은 용산구에 있는 땅이니 일단 용산구의 허락을 받아야한다고 생각을 했다. 어떻게 연락이 닿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용산구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는 것과 용산구청장님 sns 문자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을 생각했다. 후자의 방법은 사실 구청장님이 안 보실 거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장문의 글을 남겼다.그런데 문자를 보내고 하루가 지난 후 바로 구청장님께 답장이 왔다. 용산구에서 직접 줄을 그려줄 테니 와서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셨다.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바로 찾아뵐 시간을 잡았다. 용산구청에 가서 용산구청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담당자분과 함께 준비한 ppt로 남영역의 문제점 그리고 해결방안을 말씀드렸다. 우리의 의견을 들어주시고 변화까지 약속해주셨을 때 정말 꿈만 같았다. 그리고 한 달 후 남영역에 줄이 생겼다.처음 생겼을 때는 남영역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줄이 익숙하지 않은지 줄을 서는 사람보다 그냥 막 서있는 사람이 더 많아서 “어떻게 줄을 알리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남영역의 줄을 보신 학우분께서 학교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서 ‘줄이 생겼으니 줄을 지켜달라’라는 글을 올리면서 많은 학우들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한두 명이 줄을 서다 보니 다른 분들도 서기 시작했다. 아침에 통학을 할 때 줄을 지켜주는 학우들을 보면 기뻤고, 새치기 없이 시작하는 통학이 행복했다. 이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짧은 기간이었다. 그냥 내가 불편해서 시작했고, 고맙게도 그런 문제점을 함께 공유하던 친구들이 있어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잘 지켜주는 학우들 덕분에 우리들의 노력이 의미있게 되었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누구나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불만을 갖는다. “여기는 왜 이리 깜깜할까?”, “이 시설은 이렇게 변화하면 사람들이 더 편안할 텐데” 등이 있다. 변화는 우리가 느끼는 불만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느꼈다. 소소한 나의 불편함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자신의 불편함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 과거의 나도 작은 불평, 불만으로만 끝냈다면 이러한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의 불평을 당신의 손으로 바꿔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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