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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 767 호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같이 달린다

  • 작성일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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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05
박찬웅

▲ 러닝 기록 (출처 : 박찬웅 기자)


  오후 7시 우리 학교 정문사람들이 서서히 모인다인사는 나누는데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코리안 지드래곤'처럼 각자 정한 이름이 있고간단한 대화를 나눈다


  준비운동은 오 분을 넘기지 않는다큰 대화 없이 출발하고 3km를 달리고 돌아와 다 같이 사진 한 장을 찍으면 해산이다처음부터 끝까지 30여 분뒤풀이는 없다.


  A(국어교육과·2학년)는 여기에 3개월 째 나온다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학과와 나이그리고 활동명과 이름이 그들이 아는 정보의 전부이다어색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목적이 러닝이다 보니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요"


백 개를 넘긴 크루들


▲ 서울시가 운영하는 7979 서울러닝크루 (출처 : https://www.yna.co.kr/view/PYH20230525068900004)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22년 기준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인 러닝크루는 이미 100개를 넘었고, 서울시가 운영하는 7979 서울러닝크루의 참가자 수도 329명에서 898명으로 한 해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캠퍼스 안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모 대학 러닝크루의 경우 평소 100여 명이던 신입 지원자가 한 학기 만에 250여 명으로 늘었고, 정회원 수도 200명에 육박했다. 크루 회장은 지원자 수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도 눈에 띄게 늘었다고 전했다.


  연령 구성이 특히 눈에 띈다. 국내 러닝 인구는 천만 명 규모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60~66%가 MZ세대다. 미국에서 20·30대 비중이 약 40%, 유럽이 45%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은 확연히 젊다. 확산 속도도 서구보다 약 2.5배 빠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4년 서울하프마라톤에서는 전체 참가자 2만4명 가운데 2030세대가 1만3294명으로 66%를 차지했다.


  동아리와 크루를 가르는 건 규모가 아니라 형태다. 동아리에는 회칙이 있고 회장이 있고 회비가 있다. 크루에는 대부분 없다. 오픈채팅방 하나가 조직의 전부이고, 가입은 간단한 가입 절차면 끝난다.


  느슨해서 오래 못 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이다. 우리 학교 러닝 크루 회장 B씨는 크루를 만들 때부터 이 구조를 의도했다고 했다.


  "조직적인 구조보다는 러닝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담 없이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부담이 없다는 점이 진입 문턱을 크게 낮췄다. 정기 활동에 빠지면 눈치를 봐야 하는 조직과 달리, 크루는 나오고 싶은 날에 나오면 된다. 시험 기간에 한 달을 통째로 쉬고 돌아와도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는다.


  B씨는 크루의 장점을 '함께' 달리는 데서 찾았다. 혼자였다면 그만뒀을 지점을 옆 사람 때문에 넘긴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서로를 아는가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파악하는지 지켜봤다.


  출발 전 십 분 동안 오간 대화는 대체로 장비와 기록에 관한 것이었다. 새로 산 장비를 자랑하거나 시계를 설정하고, 러닝 코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전부였다. 달리기가 끝나면 각자 시계를 들여다보고 기록을 공유하면 끝이다.


  C씨는 이 과정이 자기소개를 대신한다고 말했다.


  "굳이 자기소개나 억지로 하는 대화 없이도 편하게 이야기하면 되어서 좋아요"


  학과나 학번을 묻지 않아도 대화가 성립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장점이다. 학년이 낮다고 조심할 일도, 높다고 챙겨야 할 일도 없다. 위계가 옅어진 자리를 페이스와 기록이라는 공통 언어가 채운다.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들


  물론 모든 크루가 편하기만 한 건 아니다.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해 조용히 나오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D씨는 활동 한 번 만에 발길을 끊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달리는 것을 기대했는데,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어요"


  이런 문제를 의식한 크루들은 나름의 방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페이스별로 그룹을 분리하거나, 초보자 전용 회차를 만드는 등의 노력이 그 예시이다.


  지자체도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다. 서울 강북구는 상반기 청년 대상 러닝크루가 조기 마감되자 하반기에는 40·50대까지 대상을 넓혔다. 9월부터 11월까지 4주 과정으로 러닝 자세 교정과 슬로우 러닝 이론, 호흡과 페이스 조절법을 단계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기수별 전용 커뮤니티 채널을 열어 자율적인 모임이 이어지도록 지원한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만의 문화로 남지 않으려는 시도들이다.


캠퍼스 밖으로


▲ 러닝 크루 출발 장소인 상명대학교 정문 (출처 : 박찬웅 기자) 


  크루 활동은 캠퍼스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회 참가를 위해 지방과 해외로 떠나는 이른바 '러닝 관광'도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20인승 버스를 빌려 단체로 이동하고, 최소 하루 이상 개최 지역의 식당과 숙소를 이용하는 식이다. 한국관광공사 분석에 따르면 주요 마라톤 한 건이 개최 도시에 만들어내는 경제 효과는 평균 50억 원을 넘는다.


  러닝 전문 미디어 런톡의 조상래 대표는 마라톤에 청년과 여성이 적극 참여하면서 중장년 남성의 스포츠라는 기존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외국인 참가자도 늘어 지역 경제와 국제적 위상 양쪽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육상계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오성관 대구체육중·고 감독은 비인기 종목에 가까웠던 육상에 20·30대가 유입되는 상황을 저변 확대 차원에서 반가운 일로 평가했다. 보는 스포츠에서 직접 하는 스포츠로 흐름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접근성이 좋은 달리기가 가장 적합한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그만두면 무엇을 잃는가


  취재하며 만난 모든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이 모임을 그만두면 무엇을 잃겠느냐고. 대다수는 “규칙적인 운동 습관”이라는 답변을 내놓았고, 일부는 “느슨한 관계 속에서 의무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 발표한 트렌드 분석도 비슷한 흐름을 짚는다. 취향을 매개로 모인 소규모 공동체가 생활의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감과 관계에 관한 언급량은 전년 대비 20% 늘었고, 웰니스 관련 언급량도 16% 증가했다. 성과와 경쟁보다 정서적 안정을 중시하는 흐름이 넓어진 결과라는 해석이 붙는다.


  크루가 채운 자리를 생각해본다. 학과 사람들과는 수업 이야기밖에 하지 않고, 동아리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혼자 지내기에는 학기가 길다. 그 사이 어딘가에 크루가 들어섰다. 이름을 몰라도 되고 매번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나가면 누군가 옆에서 같은 속도로 달려주는 관계다.


  느슨하다는 말은 약하다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그런데 매주 새벽마다 사람이 모이고, 학기가 바뀌어도 방이 유지되고, 졸업한 선배가 가끔 돌아와 함께 뛴다면 그것을 약하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무엇을 강하게 묶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남은 관계도 있다.



박찬웅 기자